동물자유연대 : [활동가 에세이] 상실과 상처 속에서 지켜낸 희망

농장동물

[활동가 에세이] 상실과 상처 속에서 지켜낸 희망

  • 동물자유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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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10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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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겨울 공기에 풋풋한 건초 냄새와 거친 말의 냄새가 뒤섞여있다. 네 마리의 말이 우적우적 건초를 씹는 소리가 차곡차곡 쌓인다. 한순간에 강력한 울음소리가 고요를 깬다.

잔잔하지만 만만하진 않은 공주시 폐마 목장의 마지막 생존자들을 만났다.


감정지수가 높고 섬세한 말이 낯선 인간의 등장에 체할까 봐 멀리 서있었다. 그러다 유난히 애정 담긴 눈빛을 보내는 말에게 이끌리듯 다가갔다.


이마에 뿔 모양의 흰 털이 있는 '유니콘'은 촘촘하고 고운 속눈썹 아래 흑진주같이 우아하고 깊은 눈으로 바라봐 준다. 달콤한 눈 맞춤에 잠시 시간이 멈춘 듯 황홀하다.


옆방에는 빛 한줄기가 내려오듯 얼굴 한가운데 흰 털이 길게 이어진 '천지의빛'이 있다. 29살 이란 고령의 나이로 참혹한 환경을 버텨냈다. 단순히 오래 산 말이 아니라, 긴 세월 동안 살아남은 지혜와 끈기가 느껴진다.


느긋하게 식사를 마친 '레바로'는 나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멀리 시선을 고정한다. 마치 눈짓으로 함께 봐달라고 하는 것 같아 시선을 따라갔다. 아무것도 없길래 다시 '레바로'를 봤는데 계속 그곳을 응시하고 있다.


눈앞에서 친구들이 죽어가는 공포는 얼마나 클지, 더러운 오물에 갇힌 공허는 얼마나 깊을지 상상조차 안된다. 그 안에서 끊임없는 상실과 상처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을, 그리고 서로를 지켰다.


감내해 준 말들에게 감사하며 지옥 같았던 이곳을 폐쇄한다. 감옥 같았던 공간에서 나오자 어리둥절한 표정이지만, 이내 기품 있게 걷는다. 멀어지는 발굽 소리가 가뿐하고 경쾌하다.


네 마리 모두 보호처로 가는 차에 온순히 탑승한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본다.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마치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것처럼.


'장산클리어'는 이주해서 먹을 건초를 몰래 빼먹다 딱 걸렸다. 순진한 표정이 못 말리도록 사랑스럽다. 강인한 생명력과 선명한 삶의 의지에 존경 어린 미소가 지어진다.


짧은 만남에 정들 만큼 사랑스러웠다. '레바로'가 창가에 얼굴을 비춘다. 헤어짐이 아쉬운 인간의 마음을 알아주는 걸까. 과분히 따뜻하다.

생존만으로도 지쳤을 텐데 희망을 지켜 준 말들을 넘치도록 축복한다. 존재만으로 사랑받기를 벅차도록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