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일보 칼럼입니다. 꼭 읽어보시길....정독하시길 빌며.
[부일시론] 밥상 앞에서
/오수연 소설가
나는 어릴 적 어머니 손잡고 갔던 닭집을 또렷이 기억한다.
나무틀 닭장 속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닭들,노란 눈과 붉은 벼슬,깃털과 함께 다져진 축축한 흙바닥. 그 냄새와 열기를 지금도 나는 느낄 수 있다. 어머니가 닭장을 찬찬히 들여다보다 손가락질을 하면,닭집 아저씨가 마술사처럼 어느새 닭 한 마리 두 발 모아 손에 거꾸로 들었으며,꼬꼬댁,쿵.
그때는 닭집에 닭털 뽑는 원통형 기계가 있어,닭을 던져 넣으면 스르렁 돌아갔다. 닭은 목에 칼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기계 속에서 푸드덕댔다.
그리고 나는 학교가 파하고 무거운 가방 끌며 집으로 돌아가던,초등학교 시절 어느 날을 기억한다.
우리 동네는 밭 한가운데 신흥 주택들이 마구 올라가던 도시 변두리였다. 초가에서 판잣집으로 변형 중인 어떤 집 문간에,개 한 마리 목매달려 버둥거렸다. 도시인도 농민도 아닌 어중간한 아이들이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흰 발바리가 매달린 그 문은 원래 집 뒤편으로 담장에 작게 뚫린 쪽문이었으나,갑자기 그리로 길이 넓어지는 바람에 대문보다 더 외부로 노출되었다. 그 집 사람들은 앞마당 아닌 집 뒤안에서 개를 잡았건만,행인들 오가는 길가에서 그런 셈이 되고 말았다. 어수선했던 70년대 초반의 풍경이었다.
그때 그들이 자기들이 하는 짓이 동물 학대라고 생각했을까?
아마 아닐 것 같다.
세월 훌쩍 흘러 최근 \'동물보호법 개정안\'이 예고되었다.
이 개정안은 어떤 짓이 동물 학대인지 구체적으로 열거하여 방지와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한다. 정당한 이유 없이 동물을 죽이거나,노상 등 공개된 장소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죽이거나,함께 기르는 다른 동물이 공포감을 느낄 수 있는 장소에서 죽이거나,목을 매다는 등의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는 행위는 동물 학대로 처벌받는다. 동물보호단체들의 기대에는 못 미칠지언정,이 개정안만 제대로 시행돼도 70년대처럼 했다간 벌금을 물고 징역까지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첫 번째 나온,정당한 이유 없이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구절이 문제다. 무엇이 동물을 죽여도 학대가 안 되는 정당한 이유인가? 그런 건 없다는 한쪽 극단에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므로 다른 모든 생명체에 대한 생사여탈권이 있다는 다른 쪽 극단까지,수없이 많은 칸과 조합이 있다. 생각하기 나름이요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나는 우리가 과거에는 무시했던 동물의 고통이나 감정을 비로소 고려하게 됐을지라도,우리 시대 나름의 공백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누구나 알았는데 지금은 오히려 잊어버린 어떤 측면. 그것은 죽음이다. 동물이 당하는 심신의 고통이 많건 적건,도살은 도살이다. 오늘날 그 피 튀기는 현실은 우리 눈앞에서 거의 완벽히 삭제되었다.
도살 과정은 높다란 도축장 건물 속으로 집약되고,또 도축장은 대도시 어느 구석에 있는지도 모르게 숨어버렸다. 넓고 밝은 슈퍼마켓에는 크기도 일정한 포장육들이,마치 치약이나 바가지처럼 무제한으로 팔린다. 그리고 닭,돼지,소가 웃는 간판이 그려진 식당에서는 닭고기,돼지고기,쇠고기가 다양한 요리로 식탁에 오른다. 지나가다 차바퀴에 깔린 고양이만 봐도 기겁을 하면서,우리는 주변에 넘쳐나는 그 많은 음식들이 그 비슷한 종류라는 걸 잊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감각을 잊었다.
기계화된 설비로 대량으로 생산,유통, 소비된다 해도,동물들은 공산품이 아니다. 우리가 경제사정과 건강을 생각하여 얼마큼 그들을 소비할까 고민할 때,우리는 한 가지 항목을 더 넣어야 한다.
그들은 단지 음식 재료만은 아니라는 것.
아,나는 아직 채식주의자가 아니며,내가 얼마나 죽여야,즉 소비해야 적당하고 정당한지 늘 갈등한다. 피 냄새 맡을 일도 손에 피 한 방울 묻힐 필요도 전혀 없는 우리가 과연 과거의 인간들보다 덜 잔인할까? 그들은 최소한 자기 입에 들어가는 것이 방금 전까지 살아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비명을 듣고 경련을 느꼈다. 지금 우리가 보고 듣지 않는다고 해서,동물들이 전과 달리 웃으며 죽지는 않을 것이다.
/ 입력시간: 2005. 10.19. 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