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권 책 읽기 소모임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를 읽고.
소목
동물권연구활동모임 프로젝트 "A" 활동가
질문을 달리하면 왜 우리는 개를 먹는 것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며, 돼지와 소는 아무런 느낌 없이 먹고 신는가? 개식용이 불러오는 혐오감, 그 근저에는 우리가 동물을 아끼고 그들이 고통 받지 않기를 바라는 공감empathy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돼지나 소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공감 혹은 혐오감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책은 공감의 상실과 정신적 마비 즉 느끼지 않기를 배우는 과정에 관한 것이자, 이를 가능케 하는 근본적 구조인 “육식주의”를 속속들이 해부해서 보여준다.
육식주의는 특정 동물들을 먹는 일이 윤리적이며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신념체계다. 생존하기 위해 육식
에 의존하는 육식동물과 달리 육식주의자는 필요가 아니라 선택에 따라 고기를 먹고, 이러한 선택은 항상 신념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육식주의가 선택임에도 선택이 아닌 듯이 보이는 것은 육식주의의 비가시성 때문이며, 육식주의가 눈에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육식주의가 특정한 유형의 신념체계, 바로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육식주의는 사회의 주류, 다수, ‘보통’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신념들이자 그 신념을 반영하는 실천이다. 다시 말하면 신념과 실천을 강고하게 떠받치고 있는 폭력적인 심리. 문화, 정치, 경제체계이기도 하다.
우리는 젖을 떼는 순간부터 동물을 먹는다, 아니 대부분 우리는 젖도 소의 젖을 먹고 자란다. 이유식을 거쳐 성인식을 하면서 육식은 우리의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이 아니다. 육식의 취향과 육식 행동은 “의사와 부모와 교사가 고기를 먹으면 힘이 세진다”는 이유로 말을 배우기도 전에 틀이 잡혀서 평생 그대로 지속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육식주의 체계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모태 육식주의자’로 살아가고, 육식주의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고 이해하며 동물을 포함해서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는다.
“상상해 보라 당신의 현실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환상이라고, 당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뇌가 접속된 컴퓨터 매트릭스에 의해 직조된 가상현실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매트릭스는 스스로 살아 있기 위해 우리를 배터리로 삼아 에너지를 빨아들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다는 환상 속에서 현실에 안주한다.”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와 같이, “우리는 육식주의라는 매트릭스 안에서 환상을 현실로 받아들임으로써 그 시스템이 진짜 현실 노릇을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갇힌 자이자 가두는 자이고, 희생자이자 가해자이다. 우리는 실존하는 자로서 행동하지 않고, 시스템이 원하는 모습의 우리로서 행동한다. 우리는 능동적인 시민이 아니라, 수동적인 소비자이다.”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의심 없이 믿고, 생각 없이 알고, 느낌 없이 행동하라!”고 주문하는 육식주의 시스템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먼저 이 시스템의 구조와 작동원리에 관해 속속들이 알아야 할 것이다.
육식주의의 구조와 작동방식
육식주의 체계는 정부, 축산업을 비롯한 각종 산업, 학계, 의료계, 미디어 등이 체계적으로 연동되어 유지되는 ‘동물산업복합체’를 포함한 문화. 정치, 경제체계와 우리의 신념, 인지, 감정, 행동을 결정하는 사회 심리적 체계가 연결된 이중구조를 갖는다. 이러한 외적, 내적 체계는 정당화의 기제라 할 수 있는 3 가지의 신화(3N)에 근거하여 (재)생산된다. 즉 육류를 먹는 일은 정상이며normal, 자연스럽고 natural, 필요하다 necessary는 것이다.
취향, 관습과 전통이란 이름아래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육식의 활동은 “육식은 정상적이다”라는 신화에 의해 정당화되고 세대를 거쳐 이어져 온다. ‘모태 육식주의자’인 우리 다수는 자기가 육식주의 시스템의 신조에 따라 행동하고 있으며 자신의 가치관과 선호, 행동양식의 상당 부분이 그 시스템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외부에서 주어진 아주 좁은 범위의 선택지를 놓고 고른 결과일 따름인데 말이다.
인류가 태곳적부터 동물을 사냥해서 먹어 왔기 때문에 “육식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이는 육식행위를 단지 사물의 자연적 질서에 따르는 일처럼 ‘자연화’함으로써 인간집단의 생물학적 우월성의 신화를 조장한다. 유색인, 유대인, 여성, 동물에 대해 특정한 인간집단이 ‘본래부터’, 생물학적 우월하다는 믿음은 그들 집단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여러 세기동안 이용돼 왔다.
고기를 먹는 일이 생물학적 필수 요건이라면 (인간) 종의 생존을 위해 육식은 불가피하다는 신화의 예를 우리는 ‘단백질 신화’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고기가 단백질의 필수 원천이라는 신화는 필수 아미노산의 출처는 다름 아닌 콩, 곡류, 채소와 같은 식물성 단백질임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육식주의-경제체계를 유지시키는 핵심적 요소로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신화의 법적 현 실태 중 하나가 법률제도이다. “오늘날 모은 인간은 법적 인격이고 모든 동물은 법적 재산이다.(1787년 미 헌법, 노예 한명이 자유인 백인의 3/5로 계산되었듯이). 인간인 주인이 자신의 사유재산인 동물을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를 갖는다. 우리는 동물을 사고팔고, 먹고 입고 신는다.” 이에 따라 어느 누구도 축산업자들을 동물학살죄나 성폭력 죄로 고발할 수 없다.
이러한 신화들을 내면화한 우리들은 육식주의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 이 3N의 임무는 동물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행동에 내재하는 모순을 감추고 우리가 어쩌다 그걸 알아채게 되면 그럴싸하게 해명하고 넘어가는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눈가리개 역할이다. 신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특정 체제의 기둥 노릇을 하는 기관들과 그 대변자들. 의료계, 교육계. 사회의 주요 기관과 제도들이다.
우리의 심리적인 체계, 생각체계를 저자는 육식주의 스키마라고 부르는데, 이는 육식주의-매트릭스의 ‘내적’ 매트릭스로서 매트릭스안의 매트릭스라고 알려준다. 이 육식주의 스키마의 주된 요소는 우리의 동물에 대한 인식을 왜곡시키는 인식의 트리오(대상화, 몰개성화, 이분법)이며 이 외에도 다른 방어기제들과 신념들도 각기 나름의 역할을 맡고 있다. 육식주의 스키마는 앞에서 말한 육식주의의 광범한 매트릭스에 우리를 접속시키는 플러그다. 이러한 육식주의 스키마는 우리가 받아들이는 무수한 정보를 분류할 뿐 아니라 정보를 거르기도 한다. 사람들이 동물학대 광경을 담은 영상자료를 보고 느끼는 심적 고통이 금세 ‘사그라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우리가 왜 이 시스템의 부조리를 보지 못하는지도 설명해준다고 한다. 인식의 트리오는 동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왜곡함으로서 우리가 그들과 ‘동일시’하는 것을 막는다. 동일시가 적을수록 그들에 대한 공감도 줄어든다고 한다.
그렇다면 매트릭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출구는 없는가?
저자는 육식주의 매트릭스의 허점, 거기서 나올 수 있는 출구를 알려준다. 방어기제의 복합적 네트워크가 그 토록 방어하고 지키려고 전력을 다하는 이유가 바로 그 허점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허점은 바로 우리의 공감능력이다. 우리가 본디 동물들에게 마음을 쓰기 때문이며, 진실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매트릭스 시스템이 우리로 부터 떼어 놓으려고 그 토록 노력해온 것이 바로 이 “공감능력”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공감이 우리 뇌의 고유 기능에 따른 자동적 반응이며, 타자에 대한 공감과 동정은 우리의 자연적인 상태이므로 육식주의의 방어수단들은 우리의 천성을 거스르는 것일 수 있다.”는 ‘희망적’ 이야기를 해준다. 이 공감능력은 또한 육식주의의 역설이기도 하다. “시스템의 정교하고 미로 같은 메커니즘 아래 묻힌 위대한 진실은 바로 이것. 마음을 쓴다는 것, 우리가 관심을 갖고 마음을 쓰기 때문에 고개를 돌리고 싶어 한다. 그런가 하면 마음을 쓰기 때문에 증언해야 한다고 느낀다.”
육식주의 체계와 육식주의 스키마가 의지하고 있는 3N의 신화와 인식의 트리오는 성차별, 인종차별, 계급문제, 장애, 호모포비아, 나이 등 각종 위계와 차별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기제이기도 하다. 육식주의는 이러한 각종 차별주의와 연동되어 작동되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도덕적 진화, 생물학적 진화, 인식론적 진화에 대한 리트머스는 동물에 대해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와 태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식주의 매트릭스는 우리의 시각, 관점, 취향, 사고, 윤리, 행위를 결정적으로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세계이며, 여기서 출구를 찾아 나오는 것은 시급하고 중차대한 개인적. 집단적인 과제일 것이다.
전일적인이고 폭력적인 육식주의를 발견하고 명명했을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저항적 실천으로서 채식주의를 실천한 흐름은 이미 2,500년 전 고대의 피타고라스와 그의 신봉자들로부터 시작되었고, 오늘로 이어졌다.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를 가부장체제, 자본주의체계, 신자유주의 체제, 근대문명사회...와 같이 여러 방식으로 규정할 수 있겠으나 육식주의 체제라고도 볼 수 있고, 이러한 규정이 더 현실적이고 포괄적일 수도 있겠다. 폭력의 대상이자 비가시적 주체인 동물은 물론 반-체제적 대항을 실천하는 채식주의자들, 동물권, 동물해방 운동가야 말로 이 시대의 ‘새로운’ 소수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얼마 전에 이들을 향한 조롱, 희롱, 구조적 폭력을 ‘베지포비아’라고 명명하며 이에 대해 대응하는 움직임에 관해 들은 적이 있다. 저자도 “채식주의자가 가죽 제품을 걸치면 위선자 소리를 듣고, 일절 착용하지 않으면 순수주의자나 극단주의자로 치부되고”, “그들의 깊은 감수성은 육식주의 세상의 온갖 편견과 도발에 끊임없이 부대끼고 상처받는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동물산업복합체를 강고히 유지하는 법으로 2006년에 제정된 “동물기업테러법”(1992년 동물기업보호법이 개정된)은 ‘동물기업의 경제적 손실을 초래하는 행동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동물권운동가들을 테러리스트로 그들의 활동을 테러로서 규정하고 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시도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법은 동물산업복합체, 즉 육식주의에 의한 동물살해와 착취가 현 체계의 유지에 얼마나 중요한지 이에 대항하는 세력이 얼마나 이 체제에 치명적인지를 반증하는 것 아닌가?
마지막으로 저자가 제안하는 증언하기 - 고립된 행위가 아니라 우리 자신과 관계 맺고 세계와 관계 맺는 하나의 방법, 그것은 자신과 타인 간의 상호작용을 특징짓는 삶의 방식이다. ‘행하는’ 무엇이 아니라 ‘존재하는 방식’- 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저자는 우리가 증언에 대해 저항감을 갖게 되는 것은 ‘가장 저항이 적은 길’에서 이탈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처럼 거대한 규모의 고통 앞에서 우리가 ‘저걸 어떻게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하며 무력감을 느끼기 때문이고, 보다 근본적인 것은 인간으로서의 우리 정체성 즉 인간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디서, 무엇으로부터 이 ‘증언’을 시작할 수 있을까? 지금 체계가 갖고 있는 강고함과 거대함에 눌리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중심성을 거스르는 도도한 흐름들에 대한 믿음과 주변의 존경스런 활동가들을 만나면서 발을 떼며 줄곧 걸어갈 수 있을까? ‘공감능력’의 진실을 갖고서 말이다. 매트릭스 밖으로 첫 발을 뗀 것 같기는 한데..... 먼저 이 책의 저자 멜라니 조이를 포함해서 육식주의-매트릭스 세계에서 (기꺼이) 소수자로 살아가는 사람들, 살아 갈 사람들에게 존경과 지지를 표하고 싶다.
동물권연구활동모임 프로젝트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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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 2014-02-24 13:43 | 삭제
구입해서 읽어야할 책 목록에 찜해놓고 아직 구입못하고 있는데...당장 읽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