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달밤으로 그대들의 명복을 빌겠습니까
무슨 달밤의 낯짝으로
그대들의 생무덤에 대고
눈갈기치던 이 호된 산야 위에서
삼가 고개 숙여 명복을 빌어야 하겠습니까
묻힌 그대들이여
아직 언 땅 찍어낸 흙구덩이 속에서
다 죽지 못하고
마지막 헛발질을 하고 있습니까
혹여 남은 한 마디 울부짖음 꽉 막혀
꿈틀대다 말고 있습니까
묻힌 그대들의 새끼 하나하나
살려고 태어나
살지 못하고
살지 못하고
어이어이없이 따라 묻힌 송아지들이여
아직 어미 젖꼭지를 외우고 있습니까
움메라는 말 한 마디
어디다 놔두고 말았습니까
무슨 햇빛으로
무슨 햇빛 누리로 명복을 빌겠습니까
오늘에사 나 같은 철딱서니도 뉘우치기를
차라리 나는 인간이기에 인간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저 십우도 수행 따위 놓아버렸습니다
인간의 오랜 비유이던
그대들의 뚜벅뚜벅 거닐던 삶 모진 삶
그 삶의 수직 및 완만으로 하여금
나의 맹목 과속을 책하던 노릇도
오늘따라 아무 소용 없습니다
아 그대들의 우이독경이 백번 옳았습니다
나의 독경은 오직 인간만의 나 자신만의 그것이었습니다
이 참혹한 나의 국토의 어디에서
단 한 마리의 유일생명인바
그대들 하나하나의 생매장 앞에서
한 오리 죄책의 티끌도 애도도
차라리 모독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무슨 암흑의 언어로
무슨 암흑물질의 언어로
그대들의 언어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내 갇힌 언어가
인간 이외의 언어가 아닌 절망보다
그대들이 남겨놓은 언어 앞에서
인간 이외의 언어에 대한 무지가
나의 악몽이고 또 악몽입니다
20여 년 전 어느 나라 기자가 물었습니다
왜 시를 쓰냐고
나는 섣부르게 즉각 대답했습니다
저 소가 울기 때문에 내가 운다고
저 송아지가 움메라고
어미를 부르므로 나도 누구를 부른다고
시는 무엇을 부르는 것이라고
이제 이런 대답도 가차없이 내버립니다
그대들이 갈던 논밭은 망가져버렸습니다
갈아엎어
포도밭이 되었다가 배밭이 되었다가
목초밭이 되었다가 덩그런 축사가 되었습니다
그대들이 실어다 주던
저녁 연기 자욱한 동구 밖 길
다 사라졌습니다 끊겼습니다
그대 멍에 풀릴 때
내 조상의 제사상 머리 제수로 올려지고
내 몸의 몇 10년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 그대 무죄의 눈 앞에서 성현 앞에서
멀뚱멀뚱 그 무언의 눈 앞에서
내 눈은 더 이상 마주 볼 수 없습니다
그토록 내 어린 시절 한 식구이던
그대의 아늑자늑한 운김 나는 외양간에서
함박눈 내리는 날 새김질로 내다보고 있을 때
나도 따라서 마음 속의 무엇인가를 새김질했습니다
이제 세상살이는 그대들의 새끼가
온통 송아지가 아니라 금송아지입니다
그대 비육이 황금의 안심 등심이고 안창살입니다
무슨 슬픔으로 무슨 슬픔 아픔으로
그대들의 명복을 빌어야겠습니까
무슨 다락 같은 천당 있기에
무슨 무살생 서방정토 있기에
거기 가시라고 머리 풀어 명복을 빌겠습니까
그대들이 풀썩 주저앉는 구제역일지언정
그 태반은 인간이 불러들인 것이라면
이제 그대 뒤의 나 또한
풀썩 주저앉을 수밖에 더는 무엇이겠습니까
무슨 표현으로 무슨 고답의 의미로
그대 학살 뒤의 억지 명복을 빌어마지 않겠습니까
아 그대들의 생무덤 평토 거기서
내 고향 조상 무덤을 바라보고 있어야 합니까
내 타향 자손의 삶을 돌아다보고 있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그래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무조건 무작정 그냥 명복을 빕니다
이경숙 2011-01-19 18:28 | 삭제
읽는 내내...가슴이 미어지네요...ㅠㅠ
길지연 2011-01-20 19:58 | 삭제
고은 시인 오랜만에 시다운 시 쓰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