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는 매년 2만 3천마리 가량의 야생 돌고래가 무분별하게 포획된다.
그런데 그 엄청난 양의 돌고래고기가 소비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회를 좋아하는 일본의 도시 사람들도
돌고래고기를 어떻게 먹냐고 먹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많은 돌고래고기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 해답은 돌고래고기가 고래고기로 둔갑하여 판매가 된다는 것이다.
돌고래는 바다에서 상위 포식자다.
그로 인해서 작은 물고기부터 차곡 차곡 체내에 축적된 수은이
돌고래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양이 된다.
수은은 체내대사를 거쳐 몸 밖으로 배출되지 않고 몸에 축적된다.
이 수은은 유아의 기형을 유발하는 미나마타병을 유발한다.
일본에서 수은의 허용농도는 0.4ppm이다.
홋카이도 의료대학의 엔도 테치야 박사는
유통되고 있는 돌고래고기 샘플에서 2천 ppm이나 되는 수은을 검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성에 대하여 일본 언론은 입을 다물고 있다.
지역사회와 정부 그리고 언론의 굳건한 커넥션 때문이다.
일본정부는 1956년 수천명이 수은에 중독되어 기형아가 출산되는데도
한동안 사실을 은폐하려고 했었다.
이렇게 수은중독의 위험성이 높은 돌고래 고기를
돌고래 포획업자들과 타이지시장은
어린 아이들이 먹는 학교 급식으로 추진하려고 하였다.
고래의 포경은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nternational Whaling Commission)의 결정으로
전세계 상업적 포경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연구를 위한 포경이나
의도적인 포경이 아닌 다른 고기를 잡기 위해 설치한 그물에 갇혀 죽은 고래는 유통을 허용했다.
이 틈을 파고들어
그 많은 돌고래고기가 고래고기로 탈바꿈하여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포획 기술이 발달하여
돌고래는 고통을 최소한으로 하여 포획하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또 돌고래고기를 먹는 것은 그 마을의 전통이니 관여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고래의 개체수도 증가하였으므로
고래의 포경을 허용해야 한다고 국제 포경협회에서 주장한다.
그 주장의 지지를 얻기 위해
조그만 섬나라에 건물 한두개 지어주고 지지표를 얻는 로비도 한다.
그러한 일본 정부의 주장에 대하여 릭 오베리는
돌고래를 무차별적으로 포획하는 영상을 보여준다.
돌고래를 좁은 만으로 몰아넣고
버둥되는 돌고래들을 작살로 무차별적으로 찌른다.
바다는 돌고래의 붉은 피로 물들어간다.
아직 죽지 않고 버둥대는 돌고래가 있으면
또 다시 작살로 여기 저기 쿡쿡 찌른다.
그렇게 돌고래들은 바다를 피로 물들이며 죽어가고
어부들은 배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며 낄낄거린다.
돌고래들을 '소리의 벽'을 이용하여 해안으로 몰아넣고 작살로 무차별적으로 찔러서 학살한다.
공포와 작살에 찔린 고통에 돌고래들이 동료가 흘린 피로 물든 바다에서 몸부림을 친다.
잠수부가 물속에 가라앉은 돌고래가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
돌고래 학살이 이루어진 바닷가의 물속은 돌고래가 흘린 피로 '피의 어둠'이 내리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돌고래가 불쌍해... 혹은 타이자의 어부들은 너무 잔혹해’ 그런 생각을 할까?
나는 돌고래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타이자의 어부가 특별히 잔혹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런 비슷한 풍경을 이미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생명은
그저 수단으로 밖에 여기지 않는 것
그것은 인간 사회에 지천으로 널려 있다.
타이자의 어부들은
돌고래를 잡아먹는 것이 그들의 풍습이니 시비 걸지 말라고 한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는 것이 풍습이라고 한다.
개를 잡을 때도 나무에 매달아서 죽을 때까지 몽둥이로 두드려 죽여야 맛있다고 한다.
포경은 전 세계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에는 고래고기가 넘쳐난다.
우리 나라에도 남쪽에는 고래고기전문점이 수도 없이 성업을 이루고 있다.
그 고래고기는 모두 어디에서 생긴 걸까?
우리 나라에서는
대부분의 고래고기는 상괭이(또는 곱슬이)이라지만
고의적으로 포획한 고래도 섞여 유통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빠른 발육과 축산폐기물의 처리를 위해 초식동물인 소에게 고기를 먹인다.
그리하여 광우병이 발생했다.
그런 위험천만한 소고기를 안심하고 먹으라며 정부가 앞장서서 수입을 조장한다.
국민들이 사먹지 않으니 정부청사 경비병들에게 먹였다.
아, 그리고 미국의 소 사육시설에 외부인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하는 것도
타이자의 주민들을 닮았고
축산업자에게 불리한 기사를 쓰지 않는 것도 일본의 언론과 닮았다.
닭이 움직이면 살이 빠지고 근육이 질겨져 맛이 없어진다고
좁은 닭장에 4-5마리씩 키우고
잠도 자지 말고 빨리 먹고 살찌라고 24시간 인공조명을 밝힌다.
닭장에는 닭이라는 생명은 없다.
단지 털을 벗겨내지 않은 닭고기만이 있을 뿐이다.
동물보호법은
동물을 유흥이나 호객행위 등의 수단으로 삼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유순한 소를 머리에서 피가 나도록 싸움을 시키는
청도 소싸움 등은 예외라고 한다.
4대강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이 살고 있다.
그들의 삶의 터전을 불도저와 포크레인으로 파뒤집고 흙탕물을 일으키면
그 흙탕물 속에서 수많은 생명들은 죽는다.
그 짓을 정부가 편법을 써가며 대놓고 강행하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눈 앞의 이익을 위하여
자연의 생명을 잔혹하게 학살하는 것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이쯤 되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먼저냐? 짐승이 먼저냐?’
그런 분들에게 한 말씀만 드리고 싶다.
“동물들을 그토록 잔혹하게 대해야만 먹고 살 수 있습니까?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돌고래는 하루에 수십km는 움직여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동물이다.
이들에게 수족관이란
사람을 옴짝닥싹 할 수 없는 반평짜리 독방에 가두어 놓은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돌고래쇼를 보며
그들의 고통을 나의 즐거움으로 삼고 있다.
전경옥 2010-01-06 15:31 | 삭제
인간의 지성과 어리석음은 한끝차이.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 지성을 가진 자가 그 어리석음을 동시대에 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지성과 용기는 늘 패배하나요? 그것이 인생? 어리석음은 늘 그 시대에는 진실이었으니!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진실이 조금씩 바뀌어왔고. 그것이 나같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단 하나의 희망!
길지연 2010-01-07 02:27 | 삭제
가끔은 인간의 잔혹성에 대해 이것은 꿈일게야 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무지함 인간의 욕심의 긑이 어디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