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자유연대 : 박경리 선생님......(펌)

사랑방

박경리 선생님......(펌)

  • 이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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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5.10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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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이 되신 선생님, 후학에 영원한 등대로…\" -

          - 소설가 박범신, 박경리 선생님 영전에 드리는 편지
 

\"이미지를

고 박경리 선생님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뜰에 나와 있다가

선생님의 한 생애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갑자기 뜰에 가득 핀 철쭉, 봉선화, 패랭이, 해당화, 하늘매발톱 등

갖가지 봄꽃들이 소월의 시구처럼 ‘저만치’ 물러나 앉는 걸 봅니다.

봄꽃과 나 사이에 생긴 거리는 ‘저만치’ 이면서 곧 ‘우주적인 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패랭이를 옮겨주려고 들었던 꽃삽을 놓고 망연자실, 이제 한 발자국도 더 다가갈 수 없는

‘우주적인 거리’의 어둑신한 단층을 가만히 보고 앉아 있습니다.

마지막 선생님을 뵈었던 것이 작년이었는지 재작년이었는지,
시간조차 경계가 모호합니다.

사가(私家)로 올라가 인사 드리니까 선생님은 갈 길 몰라 헤매다가 이윽고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젊은 어머니처럼

따뜻하면서도 좀 수줍어하는 표정으로 제 손을 꼭 잡아주셨지요.

그리고 바쁘게 예약전화를 하신 뒤 산그늘에 묻힌 외딴 음식점으로 데리고 가 감자전과 삼겹살을 사주셨습니다.

“이 집에서 쓰는 야채는 믿어도 된다”면서,

야채 그릇을 밀어주던 선생님의 복스러운 손이 상기도 뚜렷합니다.

아니 선생님의 손이 어찌 야채 그릇만 밀어주었겠습니까.

선생님은 평생 그 손으로 우리 문학에 길이 남을 수많은 작품들을 쓰셨습니다.

또한 선생은 그 손으로 온갖 꽃과 나무를 심으셨고, 그 손으로 온갖 푸성귀를 손수 가꾸어

선생님의 그늘에 의지하고자 찾아오는 후학들과 길손을 먹이셨습니다.

단구동 집으로 뵈러 갔을 때던가요.

저물녘에 들고양이가 십수마리씩 선생님이 손수 만들어 주시는 저녁밥을 먹기 위해

뜰까지 몰려 내려오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선생님은 원주로 내려가신 뒤

쓰레기를 밖으로 내보낸 적이 없었다는 말씀도 제게 해주셨습니다.

썩는 쓰레기는 땅에 묻어 거름으로 만들고 썩지 않는 쓰레기는 재활용했으며

음식 찌꺼기는 꽃나무 밑동에 묻어 비료로 쓰셨습니다.

선생님의 손은 그러므로 수만장의 원고를 써낸 ‘창조적인 손’이었으며

살아있는 온갖 것들을 먹여 살찌우는 ‘어머니의 손’이었습니다.

제가 글을 쓰겠다고 토지문화관에 몇달 있었던 때에도

선생님은 손수 가꾼 푸성귀로 만든 나물과 김치를 식당밥에 내려보내 주시고 만나면

늘 ‘맛있었느냐’며 진정어린 마음으로 꼭 물어봐 주시고 하셨지요.

토지문화관은 저녁엔 불이 다 꺼집니다.

외딴 산중인 데다가 직원들이 불까지 다 끄고 퇴근하고 나면, 토지문화관은 캄캄해집니다.

밤늦게 토지문화관 어귀로 들어서면 늘 길 어둔 것이 작가로서

내 앞날이 어둔 것처럼 느껴져 아득한 기분에 휩싸이곤 하는데

그때 등불이 돼 주곤 했던 선생님 서재 불빛을 잊을 수 없습니다.

유일하게 밤새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바로 선생님 2층 서재의 불빛이었지요.

작가로서 앞날이 캄캄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도 밤새 켜져 있는 선생님 서재의 불빛만 보면 힘을 얻어

 ‘그래도 좋은 글을 써야지’하고 마음 다잡던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겠습니까.

선생님은 그런 존재이셨습니다.

앞서 간 사람이 지도를 만들고 등대를 만든다는 걸 저는 선생님 서재의 밤새 켜진 등불을 보고 알았습니다.

선생님이 이승에 계시지 않더라도, 선생님 서재의 불빛만은 계속 켜져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갈 길 몰라 갈팡질팡하거나 혹시 포기하고 싶을 때에도 선생님이 켜놓으신

불빛을 따라 저 같은 많은 후학들이 길을 찾고 힘을 얻을 것입니다.

고흐는 말했지요.

자기 길을 찾아 걸은 뒤 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걸어서 별까지 가는 것’이라고요.

선생님은 이제 고단하면서도 기운차게 걸어 마침내 별이 되셨습니다.

그 별은 남은 후학들에겐 지도가 되고 등대가 된다는 것을

선생님 계신 그 우주에서도 잊지 마시기를 감히 부탁드립니다.

영원히 빛나는 별로 우리 곁에 계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