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동물자유연대의 다양한 소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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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3.09
영화 '워낭소리' 덕분에 요즘은 지인들과의 대화 중에 간혹씩 소가 등장합니다.
저는 워낭소리를 안봤습니다. 잊혀져가는 향수를 자극하여 현대인의 감성에 적극 다가간 영화인가 본데요, 그러면서 한편으론 어쩌면 소에 대한 연민을 자극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고기 먹지 말아야겠다 라는가(이건 좀 극단적인가요?), 인간과 그렇게 교감을 나누고 기여하는 소를 인도적으로 키우고 죽여주자라는 반성 내지는 동물복지에 대해 논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으니, 긍정적인 측면을 억지로라도 어떻게 찾아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사람 마음 한켠에 감동 그거 하나 말고 뭐 또 있나요? 그것이 소 자신에게는 무슨 상관인지???하는 시니컬한 반응을 나타내고 싶기도 해요...
여하튼, 제가 워낭소리를 안보는 이유는, 그 늙은 소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열심히 노동하면서 고단한 삶을 사는, 그 소를 보면서 느끼게 될 짠한 마음을 감당하기 싫어서 였습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제가 소에게 자유를 주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를 안봤으니 잘은 모르겠지만, 영화속에서 소와 할아버지와의 끈끈한 정까지 부인한다거나 할아버지는 소를 부려먹는 몰인정한 노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워낭소리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감성이 소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없는 것 같아 결국 인간을 위한 영화일 뿐인데 우리까지 그 영화에 열광할 이유는 없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드네요.
오늘 지인들과의 대화한 내용을 통해 동물복지 이야기를 끌어내려다가 사설만 길어졌습니다... 본론은 짧을텐데요... ^^;
네, 오늘 제 지인이 워낭소리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어떤 방송에서 소의 코를 뚫어 코뚜레를 끼우는 과정을 본적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이어가더군요.
소는 수명이 20년입니다. 코뚜레를 뚫는 경우는 비육우나 젖소에겐 하지 않고 노역을 하는 소만 해당되지요. 일을 시키려면 코뚜레를 끼워서 거기에 줄을 연결해 소를 통제하지요. 그 코뚜레를 뚫는 시기는 8개월에서 12개월 사이에 한다하니 아직 송아지나 마찬가지네요.
그런데 코뚜레를 뚫는 과정에서 송아지가 엄청 저항을 하더라고 하더군요, 당연하겠지요. 자기 생살을 뚫는데 가만 있는 생명체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먹고 있는 소고기, 그 소들도 숫소들은 어릴때에 거세를 합니다. 생살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꼭 해야 한다면 전문가에 의해 마취를 한 후 제거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얘기가 또 옆으로 흘렀네요. 우린 또 항상 이래요.. 본성이 항상 불쑥불쑥 나타나죠~ ^^;)
다시 지인 이야기로 돌아가서요..... 소 코뚜레를 뚫고, 뚫은 직후 소를 적응시키는 과정에서 소가 저항하는 이야기를 하던 지인이 갑자기 제게 묻더군요.
"누나, 그런 것은 어떻게 생각해요?"
엉? 이야기의 공이 갑자기 제게 던져졌습니다. 그러니 옆에 있던 한 지인이 " 야..임마, 너 누나하고 싸울려고 하면 안되지..."
저는 동물 얘기만 나오면 싸움만 하는 사람이었나봐요. --;
"아냐,,.질문 잘했어.. 그래야 일반인들이 동물복지에 대해 이해하는 기회를 갖지..모르는거 보다 낫다..."하며 제가 뭐라 설명했을까요? 물론 제 답이 정답은 아닙니다. 하지만 근접하는지 여러분들도 생각해보세요.
옛날에는 농사를 짓거나 운송 등 동물이 노역을 하는데 있어서 대체할 수단이 없었습니다..
인류가 직립보행을 하고 도구도 이용하면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급기야는 性까지 바꾸고 복제 인간을 만들겠다는, 인간이 신의 영역을 도전하고 있는 상황까지 올 정도로 과학이 발달하여, 운송과 노역의 수단은 기계화 되어 있지만, 아주 아주 옛날에는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도구는 겨우 돌 밖에 없던 때도 있었지요.
즉, 다른 대체수단이 없으니 동물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겠지만 지금은 더 효율적인 많은 대체 수단이 있다면 더이상 동물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거죠. 그렇다면 소의 코를 억지로 뚫는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많은 농기구들이 개발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에게 노역을 시켜가며 계속 소를 이용한다면 그건 비인도적이며 비효율적인 것입니다.
동물권리로는 조금 다르게 설명할 수 있겠지만, 동물복지가 설득력을 갖는 것은 과학적 근거를 내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워낭소리의 할아버지는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대체 수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소를 노역에 이용하는 할아버지를 비인도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는,,,인류가 우주 밖으로 튀어 나가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SF소설에서나 있음직한 일들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일들도 있습니다. 과학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죠.
그런 반면, 여전히 밀림 속에서 원시적 생활을 고수하고 있는 부족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아무리 과학을 설명한들 이해할 수 있을까요, 받아들이는 속도가 신속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전부인줄 알고 사는 그들을 놓고 더이상의 반문은 할 수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물론 그럴지라도 때론 절대 합의할 수 없는 사안도 있지요.)
제 지인의 물음에 제가 제대로 답변한 것일까요?
저는 가끔은 동물복지에 대해 심오한 번민을 할 때가 있습니다. 차라리 동물권리만 주장하면 어쩌면 제 양심은 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국 인간이 인간을 설득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을 생각하면, 양심만 유지한다거나 번민에만 빠져 살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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