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동물자유연대의 다양한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 2009.08.28
과연 이 사회에 합리성이란 존재하는가?
사실 이 일을 하다보면 그 합리성에 대한 생각이 더 절실해진다. 사상의 자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는 반드시 보장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진다. 어떤 일에 반대한다는 글을 올린다. 전화를 받는다. 처음에는 내가 오해를 했다고 변명을 한다. 그 다음에 내가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설득을 한다. 설득과 타협 연대 다 좋다. 나 역시 싸움 같은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정체성을 손상시키는 일까지 우리에게 강요할 수 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당신 학교 어디 나왔어? 당신 나이가 몇이야? 도 묻는다. 이것까지는 다 이해한다. 화도 나겠지. 나는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흔들어놓았으니까. 나 역시 그 사람이 어떤 곤란을 겪던 그것이 최대한 덜 손상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야 있다. 그렇다고 내가 가진 생각의 기반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그 것이 내 사상이다.
만약 국가가 내 입을 봉쇄해버렸다면 어땠을까. 국가 공권력이 어느 날 나를 고문실로 데려가 “동물권리따위는 잊어버려 ”한다면 나는 어떨까. 아무리 누가 강요한다고 해서 내 생각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싫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리고 나서 심한 고문에 못 이겨 그렇게 하겠다고 답하고 사상전향을 할 것이다. 하지만 감옥에서 나와 내가 내 마음을 속인 것에 대해 얼마나 괴로워할 것인가. 누군가 사상전향에 대해 묻는다면 “그래도 그들은 빨갱이잖아”라고 묻는다면 이런 예를 들어주고 싶다. 사상의 자유란 내가 그 사람을 싫어하건 좋아하건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 사상과 생각이란 그 사람의 양심의 문제니까.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을 수 있고 그 생각을 기반으로 행동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것조차 공권력으로 막는 나라이다. 과연 이 사회가 과연 합리성에 기반한 사회인가.
물론 나와 그 사람들은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그런데 그냥 우리 생각이 다르니 그걸로 아무 상관 없는 일일까.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므로 다 인정해 주어야만 하는가.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중적인 기회주의자이거나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이상주의자들이다. 내가 기반을 뒤흔든 사람들은 동물을 이용해 이윤을 취하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의 이윤을 챙기기 위해 많은 동물들이 희생당했다. 그 희생이 자연스럽지 않고 부당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는 내 생각을 표현한다. 나는 대다수 시민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많은 시민들은 낯선 생각에 당혹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나의 생각을 표현 할 때 그 산업기반 종사자들은 하나같이 이런 반응이다. 그럼 우리는 죽으라는 것이냐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한다. 아니. 내가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고 그들이 그 일을 그만두는가? 아니면 당장에 그들이 망할 정도로 내가 영향력이 있는가? 그게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에 반대하는 어떤 의견이 나오면 그것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른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오면 그에 반론을 펼치고 토론의 과정을 거칠 수 있다는 것에 낯설어 한다. 그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인간사회의 합리성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야 동물의 복지나 권리도 찾을 여유가 생긴다. 마음이 답답하다. 무엇보다 합리성을 스스로의 논의를 통해 만들어나가지 못한 사회의 특징은 남의 생각을 잘 도둑질 한다는 것이다. 저작권이라는 법적인 문제에도 둔감한 사회이니 사진이나 글은 물론이고 누가 가진 생각이나 활동을 버젓이 가져다 사용하는 일들이 공공연하게 일어난다. 지금 나는 동물의 복지라는 개념을 도둑질 당한 기분이다.
개나 소나 동물복지 한단다.
유럽연합과 FTA가 타결되었다. 동물복지 관련 이슈가 협상 당시 제기되자 국내 여론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마치 예전 월드컵 때 누군가의 입에서 전해졌던 서구인들의 말들. 사람들은 유럽연합에서 무역압력을 넣을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개고기이슈를 다시 들고 나왔다. 누군가 그들에게 물었을 것이다. 당신들은 개고기를 가지고 우리를 압박할 것인가. 당연히 유럽연합은 개고기 이슈를 들고 압력을 넣을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언론은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한번 개고기는 문화상대주의의 외피를 살짝 입고 면죄부를 받았다. FTA에서 제기하는 것은 강제적인 무역압력이 아니다. 주권국가와 주권국가 사이의 무역에서 강제력을 띈 공권력이 발동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사실 이제 와서 따지지는 멋하지만 일전에 개고기논쟁 역시 브리짓을 끌어들인 것은 우리였다. 우리 개고기관습을 정당화 하기 위해 막말하는, 우익정치가가 전남편이었던 육체파 여배우를 필요로 하지 않았나. 브리짓 말고도 개를 먹는 문화에 혐오감을 느끼는 서구인들은 굉장히 많다. 왜 하필 그녀였나. 뭔가 구린 의도가 보인다.
여튼. 동물복지에 대한 이슈가 이미 일반적으로 수십년 전부터 있었던 유럽에서는 동물복지에 입각한 축산물을 생산하고 이를 선택할 수 있는 소비자의 권리에 대해서 논의해 왔다. 우리가 유럽과 무역을 할 때 이미 눈이 높아진 소비자의 눈높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FTA에서 이슈가 될 수 있는 부분은 그런 것이다. 따라서 농장동물의 복지는 우리가 급하게 고려해야 할 주제이다. 당장에 농장동물이 축산물이 되어 수출되고 수입되는 상황에 직면 한 것이다. 그런데. 평상시에 동물의 복지가 뭔지 생각이나 해봤겠는가. 급한 김에 생각은 해야 하고 준비는 안 되어 있으니 또 남의 생각 주워다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버릇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가금협회 동물복지학회 등등에서 유럽연합의 가금복지에 대한 심포지움을 한다고 연락을 받았다. 뭐 주최측이 그런데 뭘 바라겠는가만은. 전날 단체로 전화까지 걸어 회원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는 말까지 들었다. 유럽에서 가금복지 관련해 꽤 유명한 세명의 연사를 모셨다. 그런데.
질문의 요지를 보면 그 심포지움의 수준을 본다. “자연적인 교미가 동물복지에 맞는가? 아니면 강제교미가 동물복지에 맞는가? ”아니 이것도 질문인가? 축산동물의 복지란 산업사회의 축산업이라는 인위적인 환경에서 동물의 생태가 어긋나왔고 이를 최대한 동물들의 생태에 맞도록 바꾸어주는 모든 과정이 포함된다. 자연스럽지 못한 모든 교미는 유전자적으로든 해당 동물의 고통의 정도로든 모두 복지와는 거리가 멀다. 도대체 복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들은 복지를 약간의 환경을 기술적으로 바꾸는 technical 한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부리 자르기를 부리 다듬기 (마치 우리가 손톱을 다듬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었다. )로 해석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유럽연합의 동물복지 상황은 우리가 꿈처럼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뱃터리 케이지를 없애고 여러 다른 대안을 내놓았지만 여전히 닭들이 서로 쪼는 상황은 벌어진다. 따라서 부리자르기는 다시 허용의 범위 내에 있다. 그런데 이런 것에 대한 질문이 “유럽과 우리는 상황이 다른데 이걸 따라야 할지..”라는 것으로 나온다. 연사는 “절대 무리한 선이 아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복지 가이드라인이다”라고 답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복지는 너네만 하냐?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 동물의 입장에서의 진정한 복지는 우리가 말 할 수 있는 영역이다. 감히 누가 동물의 복지를 운운하는가? 당신들이 그것을 운운한다면 그것은 사이비이다. 복지라는 단어를 훔쳐와 함부로 자신의 입장에서 차용하고 이용할 까 겁난다. 연대, 협력, 다 좋다. 그런데 우리를 오해하면 안 된다. 우리는 현재 오랜 역사를 가진 축산업의 기반을 한꺼번에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직까지 그 대안이 완벽한 진리로 자리 잡지 못했다. 하루에도 수천 수 만 마리의 돼지 닭이 도살장에서 죽어가고 있다. 그것도 고통스럽게. 우리는 현재 그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고통을 최소한으로 만들어주고자 한다. 그것이 동물의 복지이다.
유럽에서 온 사람들의 강연을 듣고 생각했다. 아무리 조건을 좋게 만들어 준다 해도 동물들에게 그것은 여전히 고통이다. 부리로 동료를 쪼는 일들은 여전히 일어난다. 대안은 채식밖에 없다. 안 먹으면 된다. 사람들은 그걸 어떻게든 먹으려고 별별 기술을 다 발휘하는 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사람은 생각을 쉽게 바꿀 수 없는 존재인가.
마지막으로 심포지움을 끝내며 누군가 한 말이 있다. 이 말이 모든 것을 해석해 준다.
철학처럼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복지입니다. 양계산업의 무궁한 발전....
나는 그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동물과 인간의 존재를 논하고 기존의 사고를 뛰어넘어 동물의 권리까지 논한다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당장 FTA 때문에 닥친 양계산업의 어려움을 뛰어넘고 싶습니다.
결국 당신은 축산업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다. 따라서 당신은 동물의 복지를 함부로 말할 권리가 없다.
동물을 예로 설명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나 언어는 그 사회 구성원들이 소통을 위해 만든 하나의 약속이므로. 달리 이 상황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나. 개야 소야 한마디 할테니 용서해다오.
개나 소나 복지하고 개나 소나 동물보호한다. 웃기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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