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아래 육견협회라는 곳의 질문에 대한 반론을 바탕으로 쓴 것입니다.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축'에 대한 개념부터 재정리하고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 가축 [家畜]
[명사] 집에서 기르는 짐승. 소, 말, 돼지, 닭, 개 따위를 통틀어 이른다. - 네이버사전-
사전적 의미 그대로 우리나라에서 법으로 정의하는 동물 중 사람이 집에서 기르는 것은 모두 다 가축으로 획일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야생에서 기르는 타조도 사람이 사육하는 것을 법이 허용하면 가축이 됩니다. 고양이나 이구아나, 햄스터 같은 것은 법률적으로 가축으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관념적으로는 법 개념의 연장선으로 다 가축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이 글에서는 반려동물의 개념은 일단 빼고 이야기합니다.)
개가 가축이냐 아니냐, 반려동물이냐 애완동물이냐, 이런 구분은 일단 덮어놓고,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포괄적 의미의 가축은, 인간이 먹기 위해서든 반려동물·애완동물로 인식해서든 사람이 기르는 것을 가축이라는 통합적인 개념이 내포되고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때문에 개가 가축이기 때문에 식용으로 이용해도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대개는 법률적으로 '가축은 곧 식용으로 정의된다'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법률적으로도 그렇지 않습니다'. 사육허가는 되어도 식용으로 허가되지 않은 동물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오소리, 타조 등이 그런 건 말할 것도 없고 관상용조류(15종)도 축산법상 가축으로 고시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앵무새나 카나리아, 문조 등을 식용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그렇다고 억지 부리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 개인의 개념을 우리가 뜯어고치겠다고 달려드는 에너지를 낭비할 가치가 있는지, 그건 그 사람의 사회적 영향력에 따라서 판단하면 되겠지요)
그러니 가축이 곧 식용이다 라는 등식은 버려주십시오. 다만 관념상 그런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니 법률적으로 정의를 좀 더 세분화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축산법에서 가축의 정의도 스스로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점이기도합니다)
글도 길어지고 시간도 없으니 가축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끝내겠습니다.
0. 애견문화가 먼저인가 식용문화 먼저인가에 대하여
애견문화는 뒤늦게 들어왔고 원래 개는 식용이었다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인간이 동물과 함께 살아온 역사 인식을 근대에 고정시키기 때문에 나온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주장의 근거는 고대까지 올라가서 개 뼈를 가지고 와서 논리를 펼치기도 하더군요)
고고학적인 측면에서도 개는 당연히 애견문화가 먼저입니다. 물론 당시로선 애견문화라는 개념이 지금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 근거는 분명합니다.
개가 인간과 함께 살게 된 것에 대해서는 대략 14,000년~10,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학자들 중에는 130,000년 전으로 올라가기도 합니다) 이는 석기 시대입니다. 인간이 수렵과 채취를 하며 살던 시대입니다.
개는 늑대로부터 비롯된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인간과 친밀성이 높은 종이 야생개에서 변화와 개량의 과정을 거쳐서 현재의 개에 이르렀을 것으로 봅니다.
다시 개가 인간과 함께 살기 시작한 시점으로 되돌아가면, 야생의 동물(늑대종)이 먹을 것을 쉽게 구하기 위해(뼈 등 인간이 버리는 음식 부산물) 인간의 주거지에 배회하는 일이 잦아지며, 아마도 처음엔 인간과 밀접한 생활을 했다기보다는 일정 간격을 두고 살면서, 인간에게 위험성이 있는 생소한 개체의 접근이나 적의 침입을 느끼고 짖어주고, 이를 통해 인간은 위협을 감지하게 되고, 또는 수렵에도 적당한 기여를 하는 등(개라는 동물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굳이 복종관계가 아니더라도 수렵에 도움을 주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 반복되면서 인간이 이 동물의 접근을 허용하고, 그러는 사이에 친근감이 생기거나 어린 강아지들은 인간이 데려다 키우기도 하며 개와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 정착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입니다.
또한 인간 내면에는 자신의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서든 또는 감정적인 의지가 필요해서든 '애완동물'(당시로선 반려동물이라고만 정의하기엔 무리가 있을 수 있어서)을 곁에 두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도 합니다.(개,고양이,새 등등..)
이렇듯 고고학적인 측면이나 인간의 본능적인 측면으로나 인간이 개를 곁에 두도록 허락 한 것은 단지 식용을 목적으로 사육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것은 설득력이 더 약합니다. 특히나 육식동물이어서 공격적인 품성이 있고 먹잇감을 놓고 인간과 대립 관계가 있는 동물(늑대 또는 선사시대의 야생개)을 먹기 위해 개라는 가축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더더욱 설득력이 없습니다. 다만 인간과 함께 사는 게 정착되면서 식용으로 희생되는 일이 다반사로 있었을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필요에 의해 동물을 다양하게 이용해 온 역사의 흐름 중 하나입니다.
늑대(개)는 식용 가축으로 사육하기에 적절한 동물도 아니고 인간은 도구와 문명의 발달과정에서 수렵에 만족치 못하고 가축을 사육하기 시작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공격적인 위협이 덜 되는 초식성 동물과 사육이 용이한 소, 양, 염소, 돼지 등 동물을 중심으로 식용 가축화를 시켰습니다.
최초로 가축화가 된 동물이 개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는 식용의 목적이 아닌 인간이 개와 함께 공존하는 생활이 여러 면에서 긍정적이었기 때문에 시작된 것입니다.
물론 지금 이 글은, 어떤 동물은 식용으로 해도 되고 어떤 동물은 식용으로 하면 안되는, 동물의 이용을 이분화시키기 위해서 이런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개를 식용의 역사로 보는 것에 대한 지적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프랑스나 스위스에서 한때 개를 먹었던 적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하와이 일부 부족에게도 아직 개를 먹는 습속이 남아있는 곳이 있습니다. 아주 먼 옛날 한 때에, 혹은 이미 사회적 논란조차도 안되는 일부 부족에게 남아있는 습속을 내세워서 개 식용의 정당성을 설득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 자체가, 아주 많이 매우 군색한 주장 아니겠습니까? G20국가라고 자랑하는 우리나라 이 현대 사회에서 말입니다. 얼마나 논리가 없고 옹색하면 그러겠습니까? 스스로, 개식용이 현대사회에서는 더 이상 설자리가 없어지고 있으니 옛날 얘기라도 꺼내는 자신의 옹색함 인정하는 바와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개식용의 역사를 반박하기 위해 그것은 중국의 습속이었지 우리의 전통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우리의 반박도 이젠 다른 방법으로 전환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이 되었든 한국이 되었든 과거 역사를 끌어와서 현대를 이해시키려 하는 것보다 지금 현재와 미래지향적인 논쟁이 훨씬 더 유익하고, 중국의 역사가 어떻든 그들도 개를 희생시키기 위해 도살하는 것은 이제 종식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고고학적인 혹은 중세시대 이야기를 꺼내어 원래 식용이었네 아니었네 하는 과거 집착형의 논리를 만들지 마시고 현대사회와 미래 지향적인 인식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습니까? 예전에 비해 개고기 소비가 줄어들고 있다고...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합니까? 이것이 개에 대한 사회 인식의 결과인 것을요...
점점 설 자리가 없어지는 과정에서 박사라는 학자(?)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지 않기 위해 용트림 한번 해보겠다는 것인데, 처음 자신이 학문(?)연구를 하던 때와 2011년 그리고 2012,2013,2014.....점점 달라지는 사회 인식 상황을 판단하지 못할수록 그 퇴장은 더 쓸쓸하겠지요.
지난 mbc스패셜의 고기 랩소디는 인간이 동물을 식용으로만 보려는 것이 폭력성에 근거하고 있음을 대중들에게 잘 설명해주는 계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글에는 동물 전반으로 확장하지 않고 개를 중심으로 글을 썼습니다. 정말 유치한 우문우답하는 꼴이 되겠지만 이 글을 읽는 혹자들은 제가 치킨프라이 간식 먹으며 헛소리 를 쓰고 있는 중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네요. 소,돼지, 닭... 안 먹습니다. 그리고 저는 개 사육 및 도살장 조사만 한 것이 아니라 소 ,돼지, 닭 사육 및 도살 현장 조사의 이력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중에 지금은 개만 쓰는 것입니다. 모든 동물을 다 쓰면 한편의 장문 보고서가 되니, 그 모든 게 궁금하신 분들은 여기에 가면 정리해놓은 일부 자료들이 있으니 읽어주세요.
http://www.animals.or.kr/main/board/board.asp?bname=zetyx_board_report
0.그들이 개를 식용으로 인식하는 배경
동물자유연대는 2005년부터 돼지, 닭 조사를 시작했고, 2006년~2008년 3년에 걸쳐 개 사육 및 도살장 조사를 한 바 있습니다. 모란시장을 비롯해 경동시장, 인천,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일부 지역, 심지어 산속 깊숙하게 있는 개도살장까지 조사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한 자료 역시 위에 링크한 게시판에 있습니다.
개 농장을 가서 본 느낌은, 그래.. 그 사람들이 이 개들을 식용동물로 볼 수 있겠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들 눈에는 다른 여지가 없는 식용개입니다. 전문적으로 사육하는 개농장을 가보면 어린 강아지 외 거의 모든 성견들은 사람에게 적대적으로 대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그 농장 개들뿐 만이 아니라 반려동물보호소를 가도 대부분의 개들이 그렇습니다. 일정 시간이 지나거나 사람이 애정 어린 말과 손길을 내어주면 경계를 풀고 함께 친밀감을 나타내지요.
짧은 생애의 평생 동안을 사람의 진심된 사랑의 손길을 접해보지 않고 비좁은 뜬 장에서 짜고 매운 음식이나 먹고 사는 개들이 사람에게 반응을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 그들 눈에는 식용 말고 더 이상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그 개들이 비좁은 뜬장을 벗어나 사랑의 손길에 익숙해지는 순간 어떤 본연의 모습이 나올지 상상이나 해 봤겠습니까, 혹은 그런 걸 알아보고자나 해 보겠습니까? 알아도 부정하고 싶고 느껴도 외면하면사 저건 식용이야 하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채 최면을 걸겠지요.
0. 여성과 노예에 대한 폭력에 익숙해 있던 사회가 낳은 사생사회
동물에 대한 폭력이 익숙해진 사회에서 폭력의 주체자들이 무엇을 더 느끼겠습니까?
가정 폭력의 피해자들 중 상당수가 이혼을 못하거나 가정을 떠날 수 없는 환경에 방치되고 있습니다. 폭력자는 자기 아내/남편/아이/부모는 맞는 행동을 한다고 하고 맞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피해자들 중 상당수는 삶이 피폐하거나 폭력에 순응하는 모습마저 보여줍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쉽게 말하기도 합니다. 아휴....저러니 맞고 살지...
16세기~19세기 동안 아프리카에서 사람을 잡아서 노예로 매매하는 일이 성했었습니다. 노예로 팔려가는 사람들은 배 밑에 짐짝처럼 실려 항해 중에 6분의 1 이상이 사망했고, 면화ㆍ사탕수수 농장 등에 팔린 뒤 그 사회 문명의 폭력에 길들여지는 과정에서 3분의 1이 죽었습니다. 16세기 초 노예무역이 시작된 뒤 19세기말까지 최소한 흑인 노예 1,200만명이 신대륙으로 팔려나갔으며 항해 도중 등 중간에 목숨을 잃은 흑인들은 그보다 더 많아 노예매매의 희생자들은 줄잡아 2,000만~5,000만 명으로 추산합니다. 그들은 개인 별로 수가 세어지는 것도 아니고 톤 단위로 기록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억압해놓고 톤으로 거래할 때에 그들을 사람으로 보았겠습니까? 인격체가 없는 그냥 '노예'였습니다.
근대에 까지 이어온(아직도 다른 형태로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지만) 죄인에 대한 공개 처형, 공개 처벌, 공개 고문은 대중적 공포를 통한 저항의식을 마비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피착취자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함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참고 넘기도록 한 것이지요.
식용으로 희생시키기 위해 사육되는 개들, 동물들, 그러면서 인간에게 순응하게 만들거나 그 고유의 본성을 억압시켜 아무런 감성이 없는 도구화시켜놓고는, 쟤네들은 식용이야...하는 그들과 우리 사회의 인식..
...개(동물)를 식용으로만 보려는 것... 타자에 대한 폭력성의 바탕... 무엇이 다릅니까?
그 안에 얼마나 큰 폭력성이 도사리고 있는지, 철저한 자기 성찰, 사회 성찰이 더 가치 있는 일 아닌지요?
여성과 노예가 해방을 맞을 수 있었던 것은 조직적인 움직임과 자신들의 고통을 직접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우 개선에 있어서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이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말 못하고 대응하지 못하는 약자는 계속 폭력에 방치되어야 하는 것인지요?
0. 당신의 질문에는 진정성이 있습니까? 단지 어긋쟁이에 불과한가요?
마지막으로,, 개고기 이야기 나오면 소, 돼지, 닭은 불쌍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시는 분들... 정말 저희들이 그에 대해 많은 논리와 반론을 제기했어도 계속 묻습니다. 그렇다면 님들은 모두 다 잘 먹고 싶어서 하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께서 왜 갑자기 소, 돼지, 닭 등에게 연민의 손길을 내미시는 겁니까? 인격의 이중성이 엿보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동물단체의 이중성인 것 같아 지적해보고자 하는 진실된 질문이라면 저희 동물자유연대가 만든 이 사이트에 가셔서 열린 가슴으로 진지하게 읽어보십시오. http://www.savedogs.or.kr/
이 글 조차도 읽지 않고 질문하시는 분들이라면 님들은 어긋쟁이에 불과한 사람들입니다.
동물의 희생을 줄이는데에 노력하세요. 노력하는 과정에서 동물에게 가한 폭력을 멈추는 방법에 귀 기울여 주세요.
조희경 2011-06-26 23:08 | 삭제
네,.,감사합니다. ^^
글을 길게 쓰면 읽는 분들이 피곤할까봐 짧게 쓰려 노력하는데 이게 짧게 쓸 내용이 아니다보니..
조희경 2011-06-26 15:10 | 삭제
글 길게 쓰는 것을 싫어하고 시간도 많이 들고, 이미 되풀이했던 논쟁을 다시 쓰고 싶지 않지만 오랜만에 글을 썼는데 여기저기 정리 되지 않은 문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읽어보며 수정하는 것도 힘들고 시간이 많이 가서 꼼꼼하게 정리하지 못한 점, 혹 문장중 정리가 안되 보이는 부분이 있으면 행간에 담긴 뜻으로 전체를 이해해주세요 ^^;
김수정 2011-06-26 16:31 | 삭제
좋은글 정말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보태드릴수있는게 이껏 감사하단말 밖엔 없습니다. 고개숙여 정말 감사드립니다.
강연정 2011-06-26 19:32 | 삭제
200년 전에 노예해방을 외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100년 전에 여자에게 투표권을
달라고 하면 감옥에 집어 넣었습니다.
50년 전에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면 테러리스트로 수배 당했습니다.
단기적으로 보면 불가능해 보여도
장기적으로 보면 사회는 계속 발전합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여도
대안이 무엇인가 찾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장하준 교수의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머리말에 있는 글입니다..
윤진영 2011-06-26 19:59 | 삭제
정말 피곤한 일이져? 비슷한 논쟁을 계속해야된다는것..
얼마나 힘드셨을까여? 저같음 버티지 못할것같은데..^^
저같은 일개회원들도 지치는데..
대표님..꼭 건강하세요.
이은정 2011-06-27 22:57 | 삭제
대표님 담아가요~~^+^
감사 합니다.
길지연 2011-06-27 15:18 | 삭제
동물보호 운동이라고 하면 개나 고양이를 사랑하고 개고기 식용을 반대한느 정도라고만 알지요. 가장 기본적인것은 '생명에 대한 존엄, 평등'이 먼저지요. 그러면 야채나 과일도 어류도 생명이다,라고 반문하시지요.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날마다 다른 생명을 해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덜 고통을 주는 것으로 최소의 가치를 두는 것 입니다. 과일을 따 먹고 채소 잎을 따 먹고, 추수를 하지 않으면 얼어 죽는 곡식을 먹고 그것만으로도 풍요로운 식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비구니 스님들의 사찰요리 보세요. 생명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도 일품 요리를 만드시잖아요. 자기의 건강을 위해서. 가족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ㅇ육류 섭취는 자제하여야 하며 나아가 윤리적인 면에서도 다른 생명에 대한 존엄을 생각해 봐야 할 때이지요.